맞습니다. 학급당 인원수가 많은 것도 문제고, 교사들부터가 토론식 수업을 할 줄 모를 겁니다. 저부터도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토론식 수업을 실제로 하는 선생님은 딱 한 번 만나봤을 뿐이니까효. 대학원까지 가니, 좀 미흡하긴 해도 토론으로 수업이 진행되더군효.
그 유일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위에 예를 든 것처럼, 토론하면, 시사문제나 이런 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죠. 좀 유별나게 빠른 학생들도 있겠지만, 어른들과는 달리 이런 것에 아이들이 뭔 관심이 있겠습니까. 잘 될 것 같지가 않군효. 암튼, 당시 샘이 토론식 수업을 진행했던 과목들 중에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수업은 놀랍게도 '수학'과목이었습니다.
부분집합의 개념을 가르치는 단원이었을까요. 그 샘께서 칠판에 간단한 질문 하나를 적어 놓고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바로 정답을 내놓지 않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진행시켜본 거죠. 제가 기억하기로 이분은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면, 그 다른 주장을 하는 학생들끼리 토론이 진행되게끔 했고, 그 토론의 정리까지도 학생들 자신이 하도록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질문의 정답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그분의 질문은 이랬습니다.
두 집합 A와 B가 있다. A={1,2,4,7,8,10}, B={4,7,8,10}. 어느 집합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가. 또는 어느 집합이 큰 집합이고, 어느 집합이 작은 집합인가. 이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질문이 정확히 기억나지를 않네효. 벤다이어그램을 그려서 물었던 것 같구효.
이 질문에 A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B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각기 손을 들었죠. A 쪽에 손을 들었던 학생의 수가 더 많았던 걸로 기억나는군요. 이윽고 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발표해보라구요. 공부 열심히 하는 똑똑한 한 여학생이 대답을 했죠. 두 집합을 이루는 개개 원소들 하나하나를 보면 집합 B에 들어있는 원소들은 다 집합 A에도 들어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이런 식의 모범답안이었을 것이고, 당연히 이쪽이 정답이었죠. 그런데, 당시의 샘은 여기서 끝내지를 않고, 반대쪽에 손을 들었던 아이들에게도 의견을 물었습니다.
공부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지만, 토론을 시켜보면 나름 조리있게 말을 하곤 했던 한 남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앞의 여학생의 말도 맞지만, 두 집합의 원소들 각각을 비교해보면, 집합 B가 더 큰 수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은 수들은 그보다 큰 수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집합B가 집합A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집합A가 집합B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거수 인원으로 볼 때 소수에 속했던 그 학생의 주장은 대략 이랬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오답이고 궤변이었던 거죠. 그 단원에서 가르치려고 했던 내용으로 볼 때 선생의 질문의도에서 벗어난 것이었기도 하구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남학생의 답변에 대한 그 선생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웬만한 선생님들 같으면, 무슨 헛소리냐 정답은 여학생 쪽이다. 집합을 이루는 원소인 수의 크고 작음이 문제되는 게 아니다.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뭐 이런 식의 말씀을 하면서 의도했건 아니건 남학생에게 창피를 주기 쉽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질문을 할 때 생각하고 있던 정답은 여학생 쪽이 맞지만, 틀린 답이긴 하지만 남학생이 근거로 말한 것들도 일리가 있는 얘기고 흥미로운 생각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손을 든 수가 적기는 했지만, 자기생각이 분명히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남학생은 오답이라는 사실에 내심 무척이나 창피했지만, 담임샘이 그래도 자기생각을 인정해주었다는 그 배려 때문에, 또래에 비해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던 그 남학생은 풀이 죽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샘께서 한 학년동안 진행했던 토론식 수업에 잼나게 참여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뭐 짐작하셨겠지만, 그 남학생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샘은 여선생님이셨는데, 제가 발표를 많이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이쁨을 많이 받아서, 학급 친구들의 시샘도 좀 받아보고 그랬죠. ㅎㅎㅎ
말씀드렸던 대로, 그분처럼 수업을 진행하는 샘은 이후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이후 학년이 바뀌어 만난 다른 샘들은 질문을 하시길래 기껏 발표를 하면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쪽이나 주시고 그러더군효. 그후로 토론식 수업을 잘 이끌어나갈 줄 안다고 느꼈던 샘은 대학원에 가서야 딱 한분 만나봤습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3학년때의 그 선생님만큼은 못했다고 생각되지만 말입니다.
여기까지, 조낸 자랑한 거 같지만, 학급 당 인원이 많다고 할지라도 과목이 사회계열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토론식 수업이 가능하고, 그처럼 어린 시절의 경험 한두번이 머리 다 크고 나서의 수백, 수천번의 경험보다 더 유익하고 효과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이 글은 옵히님께서 2007년 7월 16일에 찌질넷에 발표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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