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 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가 죽기 약 2년 전에 완성한 마지막 장편소설이다(1928년). 그때 그의 나이는 43살 이었고, 당시 그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이 작품을 2번이나 고쳐 쓰며 많은 애정을 보였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탄광촌은 작가의 고향인 이스트우드로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그와 동시대를 산 작가인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1857-1924),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 등과는 작품 내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철저한 내면성과 심리적인 면에 치중했다는 면에서는 공통성을 보인다. 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관점이 중심이 되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와 동시대 작가들과는 가장 큰 차이성을 드러내고 있다. 로렌스가 이성보다는 감성 그리고 남성보다는 여성이 작품 전반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이전의 서구 사상을 이끌어 온 이성적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를 과감히 벗어던지는 것(deconstruction)이다.
즉 로렌스는 지금까지의 이성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온 서구 문명을 비판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로고스 즉 청교도 정신에 불복하는 자유의지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문제 설정과 해석방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면 “이성”이다. 또한 근대성은 사물을 이분화 시켜 그 중 하나를 중심으로 삼았다. 즉 남/여 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는 상위 개념으로, 정상/비정상에서는 정상을 상위 개념으로 서양/동양에서는 서양을 상위 개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을 구분하는 바탕에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내세웠던 것은 당연하다.
근대 즉 모더니즘에 있어 텍스트의 비평은 저자의 의도이고 저자의 사상에 주로 초점을 둔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은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기위한 매개체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며 이것을 구조주의라고 한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을 연결하는 것이 하나로 구조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를 주창하는 비평가들은 작가를 죽음(R. Barthes)에 이르게 한다. 즉 텍스트는 독자의 역량에 의해 분열되며 변화되어 다양하게 뻗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Dissemination, Derrida).
로렌스의 작품 중 하나인 채털리 부인은 근대적 남성 우위의 사고를 바꾸어 버린다. 작품 속에 남성들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구걸하는 자들이며 채털리 부인을 성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체에 불과하다. 모든 시점이나 사건의 전환은 여성인 채털리 부인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러한 여성 중심적인 사고는 그와 동시대적인 또는 이전의 작가나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방식이며, 작품의 세부적인 자연 묘사 장면 역시 섬세한 여성의 관점이 중심이 되어있다. 동시대 여성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 작품인 등대로 (to the lighthouse) 보다 더 지독하게 여성적인 관점에서 작품이 전개되어 나간다.
누드, 이미지와 현상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항상 우리 주위에 있지만 드러나면 관심을 이끄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누드이다. 지금 이 글이 “재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알바들도 또는 이 글의 다른 어떤 문장에도 관심이 없는 알바 역시 “누드”라는 단어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어떤 문장보다 열심히 눈을 치켜뜨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을 거라는 것에 알밥 뷁알을 건다. 누드의 대상체가 아름답든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주의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에 폭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누드이기 때문이다.
국군의 날에 있었던 우리 국군의 행사는 하나의 이미지(image)이다. 일례로 국군의 날 행사에 나온 UDT는 일반 해군병이 변장(?)한 조잡한 이미지이다. 또한 탱크와 미사일 등은 우리나라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줄 것 같은 거대한 거짓 이미지까지 다양한 이미지들이 합쳐지게 된다. 이러한 통합된 이미지 속에 사회 구성원들은 군대에 대한 우호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의 군입대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되고 중요한 일로 만들어 버린다. 조잡스럽고 거짓된 이미지들의 합이 한 사회의 관념을 통제하여 고정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강의석은 누구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군대 폐지는 이상이고, 개혁은 항상 이상을 따라 간다”라고 말을 하였다. 중요한 것은 강의석은 “군대”라는 거대한 이미지의 환상을 그의 “누드”하나로 깨뜨렸다는 사실이다.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는 군인들, 거대한 탱크와 미사일 앞에 누드로 나타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 장면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그의 누드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당연히 이끌어내었다. 그의 행동이 옳고 그르다는 해석과 그 해석에 따라 나타나는 칭찬과 비난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왜곡된 이미지로 나타난 장엄한 현상에 대한 일탈과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겠다는 강의석의 전략은 이미 충분히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작품 속에 나오는 채털리 부인은 텍스트 내에서의 이미지이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꿈이고 환상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것 또한 그래서 한번쯤 이루고 싶은 것들을 텍스트는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중 누드는 우리들이 이루지 못한 “성적 욕망”의 가장 중심적인 것이라고 프로이드는 말하였다. 누드는 강의석의 경우처럼 어떤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누드가 목적이 된다면 외설이 되지만 누드가 수단이 된다면 좋은 작품으로 생성된다.
현실에서 억제시킬수록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발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교도적 사고방식 즉 근대적 이성 속에서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누드가 채털리 부인으로 로렌스는 발산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는 지식의 확실성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감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근대의 경계선을 넘어서
바이킹@찌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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