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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왜 일어날까?

정치 2008/09/08 16:37 by 알밥





 

전쟁은 왜 일어날 까?

 

88일 발발한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아 침공과 살륙, 이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으로 일어난 약 보름간의 전쟁이 일단 끝난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에서 읽는 러시아-그루지아 전쟁에 관한 언론기사는 대개 현재 전투상황에 관련된 단편적인 보도기사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모든 관련기사를 다 읽어보진 못했으니 어딘가에 전쟁의 발발원인(遠因, 近因)을 제대로 짚어낸 심층기사가 있었는 데도 내가 놓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1. -그루지야 전쟁의 원인 - 近因

 

이 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2003년 장미혁명이라고 불리는 무혈혁명으로 부패했던 전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구소련의 외무장관)을 몰아내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오른 샤캬슈빌리 대통령이 자국내의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아의 수도 쯔힌발리를 무력침공한 데 있다. 샤캬슈빌리는 쯔힌발리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앞세우고 그루지야 군을 투입시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써 약 2,000명에 가까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는 데, 사망자의 숫자는 전체 남오세티아 인구의 약 5%에 달한다. 그러면 샤캬슈빌리는 왜 남오세티아를 침공했을 까? 대개의 정치리더들은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또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민족정신을 하나로 집결시키는 작업을 애용해 왔다. 이런 점은 독재자는 물론 민주제도하의 리더들에게도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정신의 집결에 가장 효과적인 이슈는 영토보전’ ‘민족간의 대결’ ‘외부로부터의 위협 강조등이다.  굳이 먼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굳이 다른 나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역대 독재정부들이 선거때 늘 부각시켰던 것이 무엇이었던 가를 생각해 보면 잘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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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론에서도 지적했듯이 샤캬슈빌리는 나토가입을 추진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서방정책을 견지해 왔다. 샤캬슈빌리 자신이 미국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니 당연히 친미정책을 채택했고 이를 러시아가 견제하자, 어떻게든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NATO가 가장 심각한 가상의 적인데, 과거 소련을 구성했던 그루지야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나토가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미, 우크라이나 등의 발트연안 국가들이 친서방으로 돌아선 마당에 그루지야까지 그렇게 되도록 그냥 두고 보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다.

 

그루지야가 친러 자치국가인 남오세티아를 침공한 것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 격이고 주먹이 근질근질하던 효도르에게 까부는 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올림픽 개막 당일 전쟁을 일으켰고 불과 하루전에 맺은 휴전협정을 먼저 깨뜨린 것이니 명분마저 러시아에게 주고 만 것이다.

 

2. -그루지야 전쟁의 원인 - 遠因

 

전쟁의 원인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보기로 하자

그루지야민족과 오세티아민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그루지야인은 BC6세기 이전부터 코커서스 산맥에 존재해 왔다고 한다. 이 지역의 토박이인 셈이다. 오세티아인은 코커서스 북쪽, 흑해의 북쪽 연안에 뿌리를 둔 스키타이인의 후예라는 설이 정설로 취급되고 있으니 이 역시 이 지역의 토박이이다. 이들은 십수세기의 장구한 기간동안 함께 어울려 살아 오면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독립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었다. 구소련 시절, 소연방에 속해 있던 그루지야와 오세티아가 1991년 소련 해체시 그루지야 공화국으로 함께 분리독립 되었는 데, 문제는 독립과 더불어 그루지야 내부에서 민족정신이 한껏 고취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루지야어를 유일한 그루지야 공화국의 공식언어로 지정하면서 양 민족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오세티아인에게는 오세티아 고유의 언어가 있다. 구소련 시절에는 러시아어가 공식언어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독립후 그루지야의 첫 직선 대통령을 선출할 때 남오세티아인들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루지야인들은 남오세티아인을 피지배민족으로 격하시켰고, 남오세티아인들의 학교에서도 오세티아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제화를 통한 강제에 나서게 된다. 오랜 세월 고유언어를 사용해 왔던 오세티아인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고, 1992년 오세티아인들은 독자선거에 의해 독립을 결의하는 데 이른다. 결국 다민족 사회에서 어느 한 민족의 민족정신 고취는 잠자고 있는 다른 민족의 민족정신까지 깨우는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십수세기동안 그루지야인과 오세티아인은 좋은 이웃으로 같은 마을에서 살았고, 결혼도 잦았고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면서 잘 살았다고 한다. 가난했던 형제가 로또 당첨된 후 니꺼 내꺼 따지며 치고 받는 꼴과 흡사하지 않은가?

남오세티아 수도 쯔힌발리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Satan(사탄, 오세티아어로는 악마가 아니라, 천사라고 한단다)이라는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던 70대 할머니가 내게 해 준 말이 기억난다.

예전에는 (예전이라 함은 1991년 이전을 말하는 것임) 오세티아인 뿐 아니라 그루지야인들도 자기 식당에 와서 많이들 먹어줘서 장사가 잘 됐는 데, 지금은 손님이 없다면서 불평이다. 사망했지만 그녀의 남편도 그루지야인이었다고 했다.

 

3. 또 하나의 遠因

 

스탈린은 흔히들 그루지야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얼마전 전쟁에서 러시아 군이 침공했던 고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얘기도 있다. 스탈린은 그루지야인이 아니라 오세티아인이라는 거다. 남오세티아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는 데, 남오세티아 각료가 말하기를 스탈린은 오세티아인이라고 했다. 구소련 혹은 제정러시아 시절 위에서 설명했듯이 코커서스 산맥의 남쪽 지역에서 그루지야인과 오세티아인이 서로 한 마을에서 어울려 살았으니 지금의 그루지야 영토인 고리에서 출생했다고 해도 그가 오세티아인이라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참고로 고리는 쯔힌발리에서 불과 수십킬로미터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이 스탈린이 소련을 수십개의 공화국으로 갈라놓을 때, 북오세티아와 남오세티아를 뭉쳐서 오세티아공화국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북오세티아만 따로 떼어 북오세티아공화국을 만들었고, 코커서스 남쪽에는 그루지야인과 오세티아인, 그리고 압하지아인을 묶어서 그루지야공화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참고로 남오세티아인과 북오세티아인은 민족, 문화, 언어가 같다. 지역적으로는 코커서스라는 높은 산의 남쪽을 하나로 묶는 것이 더 통치하기 좋다고 생각했는 지 모르지만, 어쨌든 민족동질성을 무시한 영토분할이 오늘날 양측의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4. 이라크 쿠르디스탄 갈등과 해결과정을 통해 본 민족분쟁 종식 방안

 

통상 중동에 사는 민족은 아랍민족이다. 이라크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라크인의 약 80% 이상이 아랍인인데,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이라크 북쪽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 민족은 바로 쿠르디스탄 민족이다. 이들은 핏줄이 아랍과는 많이 다르다. 아리아인 계통이니까 이란민족과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쿠르디스탄 언어도 이란언어와 비슷하다. 이란인과 쿠르디스탄인은 서로 자신의 언어로 통역없이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예전에 서울사람과 제주도 사람이 대화하는 정도가 아닐까 추측한다.

 

역사적으로 전체민족이 하나의 완전한 국가로 독립을 한 경험이 없었던 쿠르디스탄 민족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야 오스만제국의 허용하에 처음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후 이 지역은 전승국들에 의해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구소련의 흑해연안 공화국으로 쪼개져 버린 채 최근까지 국제사회에서 잊혀진 이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쿠르디스탄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없는 민족이라고들 부른다.

참고로 쿠르디스탄 민족은 약 3,000만명이라고 하며,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에서 소수민족으로 박해받고 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후 이라크 내의 쿠르디스탄인은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받고 자치정부를 구성해서 꾸려나가곤 있지만……

 

1차 대전 이후 이라크내의 쿠르디스탄인들은 비록 이라크로부터 대우는 못 받았지만, 그렇다고 죽임을 당하는 등 심한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트당이 들어서면서부터 극심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고, 특히 후세인이 권력을 잡고 부터는 이에 반발하는 쿠르드인들을 대거 감옥에 쳐 넣고 고문하고 죽였다. 후세인 시절에는 감옥이 모자라 모든 군부대가 감옥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감옥시설마다 죄없는 쿠르드인들이 대거 끌려와 고문당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바그다드 대학에 다니던 쿠르드인 학생은 어딘가로 눈이 가려진채 끌려갔는 데, 2달을 고문당한 후 6개월간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재래식 변소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악취와 배고픔, 공포, 그리고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곪아서 이 변소에서 죽어간 쿠르드 사람들만 수천명이라고 전해진다.

 

세계가 서울에 모여 올림픽 열기에 취해 있을 때인 88년 여름, 쿠르디스탄 지역의 할랍자 (Hallabja)의 하늘에는 독가스가 뿌려졌다. 마을의 우물에도 독약이 뿌려졌다. 이 때 하늘의 날 것들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고 한다. 할랍자에 살던 사람들 수천명이 독에 중독되어 죽었고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으나, 눈이 실명한 사람 또한 수천명이다.

 

대부분의 민족들이 이런 폭압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쿠르디스탄 사람들도 끝까지 저항했고, 가진 힘을 다해 후세인과 바트당에 맞섰다.

결국,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은 제거되었고, 쿠르드인은 완전독립은 아니지만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이라크의 대통령(탈랄 자르바니)으로 쿠르드인을 탄생시켰고, 중앙정부의 각료 40%, 국회의원 약 40%를 쿠르드인이 차지했다.

새로운 국회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신헙법의 골자는 18개 자치주에게 인구비례에 따라 예산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쿠르디스탄 자치정부의 완전한 관할에 있는 주는 3개주 (아르빌, 슐레이마니아, 도훅)이고 아직 영토관할권이 의회에서 토의되고 있는 곳이 키르쿠크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라크(아랍인)와 쿠르드인의 갈등과 불신은 존재한다.

이라크인이 쿠르드 관할지역으로 넘어 오기는 쉽지 않다. 비자와 비슷한 여행통과 증명서가 있어야 하고, 수많은 체크포인트마다 일일이 검색을 받아야 한다. 아르빌 공항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다. 공항검색대에 줄을 서 있던 어떤 남자에게 공항요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너 아랍인인 것이야??” “욜로 와~~” 그러면서 그 사람을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는 걸 보면 아직 두 민족의 기저에는 상호 불신과 미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양측의 상층부, 즉 정치지도자들 간에는 후세인 압제로 인한 상처를 씻고 상호 공존하면서 발전을 도모하려는 움직임 또한 뚜렷하고, 이 같은 분위기가 아랍과 쿠르드의 일반시민에게 까지 서서히 전파되고 있다.

 

재작년까지는 이라크인들이 쿠르드 지역에 관광을 오는 것은 여행자유화가 되기 전 우리나라 일반시민들이 관광목적으로 해외를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2003년 후세인이 제거된 후 2006년까지 이라크아랍인으로서 쿠르드 지역을 방문한 사람들의 숫자는 해마다 천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측 지도부의 노력에 의해 작년 한해에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쿠르드의 관광명소를 찾아 휴가를 즐겼고 금년에는 약 1만명쯤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관광객의 증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관광은 민간 대 민간의 교류를 의미하며 막연히 서로 두려워 하고 멸시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이해를 넓히고 친교를 쌓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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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라크인으로서 쿠르드 관광을 하는 데는 결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년 5천명, 금년 1만명, 내년, 내후년, 그리고 몇 년후 10만명, 100만명이 되면 서로간의 불신의 벽은 상당히 허물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 이라크 중앙정부와 쿠르디스탄 자치정부는 미해결된 쟁점사항들, -요컨대 석유법 (Oil & Gas Law), 키르쿠크 관할권, 그리고 페쉬메르가(과거 후세인에 저항하여 싸운 쿠르디스탄 반군)의 이라크 정규군편입-과 같은 난제들도 이라크 헌법정신에 따라 합리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돌발변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러한 양측 지도부의 노력, 즉 꾸준한 대화와 교류확대는 머지 않아 양 민족간의 화합과 공존이라는 모습으로 빛을 발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저질렀던 민족억압, 민족차별 정책은 일정기간 동안만 잠시 효과가 있을 뿐이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분규를 사전에 방지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여는 효과적인 정책은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 의사결정에의 공정한 참여보장, 상대방의 고유한 것을 상호 인정하는 태도와 같은 소프트 정책이다. 민족우월주의, 민족의식고취와 같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정책은 자칫 타민족 말살정책으로 이어져 지구촌을 끝없는 전쟁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록키@찌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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