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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와 바늘귀

문화/여행 2008/03/28 14:03 by 알밥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도대체 낙타가 바늘귀로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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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예수가 언어감각이 형편없는 사람이라 해도, 부자:천당 = 낙타:바늘귀 같은 비유는 좀 이상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비유를 하는 것은 좋다. 일단 천당이 존재하는가 여부는 따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좁은 바늘귀에 하필이면 낙타인가, 호랑이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니고, 심지어 너구리도 바늘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던 와중에 존경하는 어떤분께서 말씀을 해 주시길...

καμηλον 란다. 이게 낙타(camel)로 번역이 되는건데, 이게 바로 미스스펠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καμιλον(kamilon: 밧줄) 였다는 것이며, 이렇게 기록된 성경 사본이 발견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성경에도 오역이나 잘못된 사본이 존재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솔직히 그 때 처음 해 보기 시작했다. 사실, 저 낙타와 밧줄 얘기는 소위 "성경 무오류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나온 얘기였다.

성경은 신의 힘으로 인간의 손을 빌어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그 구절 하나하나가 문자 그대로 진실이며, 별다른 해석이나 비유에 대한 이해 없이 말 그대로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그러면 진짜로 구약에 나온대로 신이 그렇게 변태적이고 가학적이며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았냐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었다.

아까 그분께 들었던 명언을 또 한마디 옮겨보자.

"성경이 진짜 신의 목소리라면, 신은 영어를 쓰는가? 라틴어를 쓰는가? 헬라어를 쓰는가? 아니면 우리말을 쓰는가? 아니면 번역도 다 신이 해 준것이란 말인가? "

결국 구약은 매우 폭력적인 종족중의 하나가 오랫동안 기록해 온 부정확한 역사서에 불과하고, 신약은 예수의 얼굴도 보지 못한 몇대 아래 제자들이 구전되어오던 소문들을 정리한 글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무시한다는 논쟁이 아직도 끊이지 않은 "매우 혼란스럽게 정리된" 문서들의 모음에 불과하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지만, 신이 냈을지도 모르는 오타까지도 믿는다는 건 좀 무식해 보인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더니, 미국에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그 동네 사람들이 나쁜짓을 많이 해서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주장하는 티비 목사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 머시냐, 태풍 머시기가 온게 우리 민족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한 목사는 심지어 독창적이지도 못하게 미국의 그 황당한 연예인 목사들의 흉내를 낸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짜투리 시간(사실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에 읽고 있는 도킨스의 God delusion 이라는 책에 나오는대로, 창조론에 입각한 "지적설계"론을 정규교육과정에 포함시키는 바람에 시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펜실베니아 도버시의 근본주의자 교육위원들을 다음번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도버시는 신의 분노가 닥쳤을 때 신을 찾지도 말라는 저주를 퍼붓는 게 바로 그런 성경 무오류론자들이 저지르는 일이다.

그런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게 되는 일은 정말로 바늘귀에 밧줄을 끼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까?






이럴 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 물뚝심송(since 2003)



물뚝심송@찌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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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수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낙타와 바늘귀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 )


    낙타냐 밧줄이냐, 바늘귀냐 '침공문'이냐?

    예수님이 부자의 구원/영생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서 19:25, 마르쿠스복음 10:25, 루카복음 19:24 등은 모두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내가 다시 자네들한테 말하네만, 낙타가 바늘귀(원문: 바늘구멍)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이." (마 19:24)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낙타는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고,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전자의 주장은 본래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는 낱말이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밧줄이 더 잘 아울린다는 관점에서이지요.
    또 후자는 본래 예루샬렘에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엔 낙타 한 마디로 어렵게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의미에섭니다.

    그런 견해들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지요.

    중요한 것은 성경학자들이나 독자들의 느낌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본래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나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터입니다.

    우선 낙타가 아닌 밧줄이라는 견해가 상당히 일리는 있습니다.

    1. 이 세 구절 모두 낙타(약대/camel)가 그리스어 원문에 모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즉 낙타입니다. 마 19:24의 경우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후기의 그리스 사본 몇 가지는 '카밀론'(밧줄/거룻줄: 배를 나루에 잡아 매어놓은)으로 돼 있습니다.

    2.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 손을 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 존 윋초의 '증거와 화해'에서도 '밧줄' 설에 힘을 줘 채택됩니다.

    3.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듯, 상식적으로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

    그러나..(이 '그러나'가 문제지요.)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사본(둘 다 번역판)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13,59,124,130,437,472,543)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서기 1000년으로 꺾이면서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밧줄'로 번역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둘째로, 극소수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합니다.

    셋째로, 그나마 그런 사본들이 퍽 후기의 것들입니다.

    넷째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가능성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랔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윗 구절에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우선적으로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산 존재를 우선적으로 뜻합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에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입니다.


    이제 크게 두 번 째로 윗 구절 후반부의 바늘귀 아닌 '침공문'설을 생각해 보렵니다.

    침공문 설이란 고대 예루샬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도 통행하기 어려운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역시 그럴 듯한 주장이지요.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한 가경의 하나인 소위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이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대문을 기적적으로 확장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특별히 그 곳을 집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원 의도와도 간접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rabbinics)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바빌론 포로기 때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인 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라삐 쉐슅이 라삐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필시 님은 '폼베디타'(현 이라크에 있던 바빌론의 고대도시. 한 유대인 학파의 본거지) 분들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즉 불가능을 뜻합니다.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나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은 폭넓게 유포돼 있습니다.

    그리스에는 이런 과장 속담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얼토당토 않은 코끼리 비유보다는 예수님의 낙타 비유가 훨씬 덜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문맥 상의 조화를 위해 '밧줄' 설을 끝내 고집한다면, 예수님은 우스꽝스런 과장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으셔야 한다는 강압적인 의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분에게도 유머 감각이 있으셨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사람이 낙타를 통째로 삼키다(!)니..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던가요?
    따라서 이 말씀과 위의 말씀들과는 거의 전혀 모순된다거나 불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이제 끝으로..우리는 다시 한 번 위 말씀에서 예수님의 본디 의도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도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 사람으로서는-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반증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함을 곁들여 강조하십니다(마 19:26b, 창 18:14 참조).

    전자 마술사들은 낙타를 '액화'시켜서 바늘귀로 통과시켜 보여 준다고 합니다. '윌리 원카의 초컬맅 공장'은 통통한 말썽꾸러기 어린이를 원심분리기 비슷한 기계에다 넣고 초컬맅 재료처럼 순식간에 '분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필요한 우화적 기적보다는..
    실제로, 예리코의 자캐우스, 아리마테의 요셒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희생적인 거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젊은 관원/율법사/부자는 슬기에 있어 영생의 비결에 근접했고 예수님이 제자의 한 명으로 초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나눠 주고 따르라는 한 마디에 슬퍼 하며 돌아갔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도 어쩌실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낙타'였던 셈입니다! 고기잡이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일부 제자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이 젊은 부자는 맘몬 신을 숭상했기 때문입니다. 즉 맘몬 신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맘몬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선택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이 점에 대해선 적절한 경구를 주셨습니다.

    "아무라도 두 주인을 섬길 순 없소. 한 쪽을 미워하고 딴 쪽을 사랑하든지, 한 쪽을 소중히 여기고 딴 쪽을 무시할 것이오. 그대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소." (마 6:24 참고: 뤀 16:13)

    미련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 축재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었지요(뤀 12:21).

    성경은 거듭거듭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팀A=딤전 6:9).
    그런 한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졸부 아닌) 거부도 있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럼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가난이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 뜻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모자람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주/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네!"란 다윋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요를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야웨 이레-늘 마련해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위대한 공급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중에 남달리 큰 재물을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나기도 했으려니와 맘의 폭도 넓어서 늘 나눠 주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자선 목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지구촌 정복을 뀌하는 세상 비밀집단에 연계됐기에 자선가 생색이나 내고 나라의 면세 혜택이나 노리고 자선기금을 내놓는 거부 명사들과 크리스천 거부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윋 시대의 바르질래(슈무엘B=삼하 17:27-29, 19:31,32, 왕들B=왕하 2:7, 에즈라 2:61, 네헤미야 7:3) 같은 슬기로운 부자가 될지언정, 다윋을 냉대한 (아비가일의 전남편) 나발(슘B 25:2, 5-13, 18-34), 어리석은 졸부의 비유(뤀 12:16-21)처럼, 또는 맨날 잔치하면서 라자로에겐 찌꺼기나 먹이던 부자(뤀 16:19-31)처럼 미련한 거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글쓴이: 김삼목사님)

    2008/05/2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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